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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 비잔티움 제국을 무너뜨린 오스만의 힘은 뼈아픈 과거를 딛고 일어선 성과요, 앞날의 발전을 짐작케 하는 것이었다. 1402년에 티무르 제국과 맞섰을 때만 해도 바예지드 1세가 포로로 잡혀 죽는 처절한 패배를 당하여 거의 멸망 직전이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은 여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무함마드 1세(재위 ?~1421) 때 나라를 추스르고, 무라드 2세(재위 1421~1451)에 이르러 재기의 날개를 펴기 시작하였다. 강력한 해군을 길러 바다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었고, '예니체리'라는 정예 군대를 가다듬었다.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 베네치아와 무역로를 놓고 벌인 싸움에서는 해군이 돋보였고, 헝가리와의 전쟁에서는 예니체리가 공을 세웠다. 1444년에는 비잔티움 제국과 헝가리, 베네치아가 중심이 된 유럽 연합군을 완전히 눌러 버렸다. 이러한 힘을 바탕으로 무함마드 2세가 1453년에 비잔티움 제국을 삼켜 버린 것이다. 셀림 1세(재위 1512~1520)는 무함마드 2세의 영광을 이어 오스만 제국이 이슬람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는 길을 닦아 놓았다.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를 꺾고, 이집트를 지배하던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티무르의 공격을 받기 전보다 2배나 늘어났다. 셀림 1세는 이후 이집트에 있던 칼리프에게 칼리프의 칭호를 물려받아 술탄-칼리프가 되었다. 이슬람 세계의 정치와 종교를 아우르는 최고의 지배자가 된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콘스탄티노플 공격은 유럽의 입장에서 보면 전쟁의 예고편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술레이만 대제(재위 1520~1566)는 방향을 유럽으로 틀어 여러 차례 위협을 가하였다. 술탄이 된 이듬해에 콘스탄티노플 너머 발칸 반도로 나아가려 하였고, 5년 뒤에는 헝가리의 수도를 차지하고 헝가리를 속국으로 삼았다. 1529년에는 당시 유럽의 강자였던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와 대결하여 수도인 빈을 포위 공격하였다. 이 소식은 전 유럽을 놀라게 만들었다. 유럽은 십자군 전쟁 이후 다시 벌어진 이슬람 세력과의 전쟁에서 과거의 패배가 되살아나는 듯 두려움에 빠져들었다. 3년 뒤에 또다시 오스트리아 원정길에 나선 술레이만 대제는 10만 명이 넘는 포로와 엄청난 전리품을 챙겼다. 오스만과 유럽의 싸움은 바다에서도 벌어졌다. 1538년에 지중해 동부에서 오스만 제국의 함대가 유럽 연합 함대와 싸워 크게 이긴 것이다(프레베자 해전). 바야흐로 지중해의 새 주인이 오스만 제국이라는 사실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었다.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절정에 달하였다. 오스트리아 빈 근처에서 이란(사파비 왕조) 국경 너머까지,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 일부와 모로코를 제외한 북아프리카 전체가 오스만의 깃발 아래 놓였다.
느낀점-① 드넓은 오스만 제국 - 술레이만 대제 때의 영역은 오스만 제국의 영광 그 자체였다.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의 수도 빈을 포위하여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고, 서아시아를 호령하는 오스만의 활약은 거침이 없었다. 유럽 사람들은 세 대륙을 거느린 술레이만 대제를 '위대한 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정복자가 아니었다. '입법자'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오스만 제국의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가 다듬은 관료 조직은 이후 약 200년간 오스만 제국의 기틀이 되었다. ② 프레베자 해전 ? 122척의 오스만 튀르크 함대가 오늘날 그리스의 항구인 프레베자에서 200여 척으로 구성된 크리스트교 국가의 연합 함대를 무찔렀다. 무적 함대의 명성을 드높인 것이다. 그 뒤 지중해 해상권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북부를 차지하였다. 이로써 오스만 제국은 가까이는 이탈리아에서 멀리는 대서양 입구까지 세력을 떨치게 되었다. 이렇게 오스만 제국이 권력과 세력을 확장해가면서 점점 왕권이 강화되고 주변국가들이 벌벌떠는 그런 강력한 나라가 되었다고 한다.